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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oha, e kuʻu Pāpā (알로하, 나의 아빠)

Aloha, e kuʻu Pāpā (알로하, 나의 아빠)

카네 훌라댄서 JIN

아빠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

이전부터 계속 생각해왔지만, 어떻게 해도 정리할 수가 없어 꾹꾹 담아왔던 이야기들.

아빠는 사회적인 기준에서 훌륭하고 이상한 성취를 이룬 사람이었다. 충주 시골 동네서 태어난 공부 잘하는 수재는 고등학교때 청주로 유학(?)을 가서 명문 코스라는 청주고-서울대를 나왔다. 핵폭탄을 만들고 싶어 지금도 사람들이 생소해하는 서울대 원자핵공학과에 입학하고, 전두환이 핵폭탄 못 만들게 해서 야구 통계를 시작했다. 듣는 사람 입장에선 이게 대체 뭔 소리인가 싶을텐데 쓰는 입장인 나도 그렇다. 한국에 프로야구가 처음 출범하던 당시부터 KBO에서 공식 기록원으로 일했던 아빠는, 이후 여러 정치적인 이유들을 포함해 여차저차 사정으로 KBO를 떠나 한국 최초로 스포츠 통계 전문 회사를 차렸다. 돌아가신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회사는 승승장구 하고 있다.

아빠의 죽음은 갑작스러운 사건이었다. 한밤중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던 그 죽음은 모든 이들에게 충격이었다. 야간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려는 내게 한양대병원 응급실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술을 좋아하던 아빠였기에, 몇번 술 먹고 넘어져 사고가 났던 적이 있어 “으휴 이번엔 또 무슨 일이람” 하고 꿍얼꿍얼대며 응급실로 갔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술이 덜 깬 상태로 응급실 베드에 누워있는 아빠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아빠의 몸에는 그 어떤 붕대도 수액도 주사도 연결되어 있지 않았고, 의료진은 침통한 표정으로 옆에 서 있고, 모친과 누나는 하염없이 울고만 있었다. 하루아침에 일어난 이상한 일이었다. 아빠의 휴대폰을 들고 멍하게 서있으려니 “업무 미팅에 오지 않으셔서 전화드렸어요.” “자제분이신가 보네요, 아버지가 휴대폰 두고 가셨나봐요” 하고 전화가 왔다.

장례식에는 프로야구 전 구단에서 근조 화환을 보내왔고 조문객이 너무 많이 찾아와 VIP 특실 두개를 이어 붙여서 써야 했다. <한국 프로야구 기록의 아버지> 같은 제목의 추모 기사, 아빠의 부고 소식을 알리는 기사가 무수히 났다. 그때까지도 아빠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던 당시의 나는 그냥 짜증만 났었다. 야구가 더 싫어졌다.

야구를 싫어했던 것은 오래 전부터의 일이다. 언젠가 중학교 시절 모친의 가정폭력에 못 이겨 가출을 시도하고 청소년쉼터로 도망을 나왔다. 쉼터로 나를 데리러 온 아빠와 원장 수녀님, 나 사이에 어쩌다보니 가족상담 같은 자리가 만들어졌다. 아빠는 자기가 네이버에 이름을 검색하면 바로 나오는 사람인데 가족들 안에서는 존중을 받지 못한다며 원장 수녀님께 한탄하고 있었다. 얼척이 없었다. 지금 자식이 가출을 해가 데리러 온 자리서 뭐라카노- 싶었다. 괜시리 아빠가 하는 일이 더 마음에 안 들었고 야구엔 일부러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빠는 어느 팀 응원해?” 라는 질문을 받으면 “시카고 컵스” 같은 뚱딴지 답을 했던 아빠. 한국 프로야구 구단들과 일을 해야 하니 KBO 리그에서는 특정 팀을 응원하지 않는다나 뭐라나. 참고로 시카고 컵스는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오랫동안 우승을 못 했던 구단이고,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바로 그 해 108년만의 우승을 했다.

우리 모친의 고향은 대구이니 내 혈연이 지정해주는 야구팀은 본래 삼성 라이온즈여야 했다. 혈연을 따라 삼성을 잡은 누나는 아빠가 살아 계실때 덕질에 야구수저로서 아빠 찬스를 참으로 많이 썼었다. 나는 아빠가 돌아가신지 10년이 지나서야 정말 뜬금없이 친구 따라 강남 가기는 커녕 부산과 치바 마쿠하리를 따라가 롯데를 잡았다. 먼 훗날 언젠가 아빠를 다시 만날 일이 생긴다면 가장 숨기고 싶은 것 중 한 가지다. 심통이 날 때마다 일부러 아빠 들으라고 “야구 지겨워~ 야구 싫어~” 하던 내가 꼴데를 잡았다는걸 알게 되면 아마 배를 잡고 웃겠지.

살아 생전의 아빠를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도 주변에 모친의 가정폭력을 자세히 이야기하면 모두가 놀란다. 20년 전 기준으로도 모친의 폭력은 충분히 형사처벌까지 가능할 수준이었고 몇몇 심각하고 특정한 사건들은 공소시효가 아직 남아 있기도 하다. 아빠는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이지만 수입이 나쁘지 않았고, 우리 집은 서울 중산층 이상 수준의 가정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 뉴질랜드로 언어연수를 보냈고 누나와 나 모두 사립초등학교를 나왔다. 그래서일까. 그런 심각한 수준의 폭력을 보면서도 이혼하지 않던 아빠를 그때도 지금도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아빠는 나를 안타까워 했고 늘 마음을 썼고 속상해했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보호하지는 못했다. 집안의 폭군인 모친의 폭력이 있을 때, 우리 가족들은 말리거나 보호하지 않는다. 옆에서 복날에 개 패듯 하는 소리가 나도 서로 모르는 척 자기 할일이나 할 뿐이다. 폭력이 내 생명을 위협할 수준이 되면 아빠는 그제서야 개입했는데, 그마저도 신고하거나 말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집에서 빼내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주차된 자가용에서 함께 밤을 새는 정도였다. 그때의 나를 집에서 데리고 나와 주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해야 했을까. 가족이라는 이름 안에서 온전히 보호받지 못했던 나는, 자라서 (혈연)가족이 아닌 이들과 서로를 이해하고 지키는 관계를 만들고 싶었다. 지금의 내가 하는 일, 그리고 내가 찾아가고 소속되는 공동체들에는 오래전부터 바랐던 가족의 모습이 담겨 있다.

원자핵공학을 전공하다가 뜬금없이 야구 기록을 시작한 아빠처럼, 가정폭력·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공익활동가로 살던 나는 뜬금없이 하와이안 훌라댄스를 배우기 시작했다. 한국에 야구 기록의 기반을 만들려 미국, 일본을 오가며 연구하던 아빠처럼, 나도 한국에 남자 훌라 선생님이 한 분도 안 계시단 이유로 일본의 카네 훌라 할라우(남자 훌라 학교)에 연락을 하고, 회사 연차를 영혼까지 끌어모으고, 모은 월급을 비행기표에 탕진하면서, 주기적으로 일본에 다녀오는 중이다.

남성으로 살아가기로 한 뒤로, 나는 내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과도 계속해서 마주쳐야 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고, 선택한 성별이 나에게 왜 중요한지 설득해야 할 때도 많았고, 애써 배려해주는 사람들은 그보다 더 많았다. 나의 주요 활동 기반인 하와이안 훌라와 여성단체 모두 성비로 따지면 여성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기껏 돈 들여 남성호르몬 맞고 수술하고 트랜지션 열심히 해놨어도 훌라를 추고 여성단체에서 일한다고 하면 ‘어쨌건 탈코한 여자겠거니-’ 하며 선해해주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았다. 일본의 카네 할라우(남자 훌라 학교)는 그래서 좋았다. 키가 작아도, 목소리 톤이 높아도, “○○○○선생님한테 카네 훌라(남자 훌라) 배우러 한국에서 온 제자래” - 라고만 하면 모두가 나를 당연하게 남성으로 패싱해주더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저 온전히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던 순간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아빠였다. 아빠처럼 나도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찾아다니고 있는 것일까? 왜 훌라를 배우러 일본까지 다녀오는지, 왜 훌라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전업으로 훌라 선생님은 하고 싶지 않은지, 왜 가정폭력·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일을 생업으로 전업으로 하고 싶어하는지, 훌라의 어떤 점이 좋고 할라우(훌라 학교)와 할라우 오하나(가족)들의 어떤 점이 좋은지, 왜 지금의 일본 스승님을 나의 스승으로 선택했고 계속 배우고 싶어하는지, 나의 혈연가족 중 유일하게 이를 이해할 사람이 아빠 아니면 또 누가 있을까. 이상한 인생을 살아온 아빠라면, 내가 왜 퀴어로 트랜스젠더로 남성으로 살아가려 하는지도 아빠에겐 긴 설명이 필요 없지 않을까.

대충 미화하고 싶지 않지만 평생 복잡미묘한 감정으로만 바라보고 싶지도 않다. 어쩌면 아빠가 나를 이해해 주었으면 했던 만큼이나, 나도 아빠를 이해하고 싶었다. 왜 그렇게 살았는지, 왜 나를 안타까워하면서도 나서서 지켜주지 못했는지. 그렇지만 물어볼 수 없다. 영영 알 수 없다.

가끔 생각한다. 아빠는 퀴어로 트랜스젠더로 남성으로 살아가는 나를 어떻게 바라봤을까. 적어도 내가 왜 이렇게 살아가고 싶어하는지 궁금해하고, 이야기를 듣고, 나와 오래 대화하고 싶어했을 것 같다. 그러면서 조금은 걱정하고, 조금은 신기해하고, 결국에는 즐거워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기억하고 싶다. 이상한 아빠는 이상한 나를 이해했을 것이다.

조각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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